블로그 이미지
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이제 봄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는듯 합니다.

매화소식이 반가운 요즘이다보니, 문득 문득 어디 나들이 갈까 하는 설레는 마음이 듭니다.

이번엔 청도와 대구방향으로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답사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곳 청도 읍성과 석빙고를 가보게 되었습니다.

청도 읍성은 고려시대 때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서 쌓았던 것을 조선 선조 23년(1590년)청도 군수 이은휘가 착공,

2년만인 선조 25년에 완공했다고 하네요.

 석빙고는 조선 숙종39년(1713년)축조되었으며 축조연대가 가장 오래된 석빙고랍니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답사팀에서 나눠준 자료를 참고로 돌아 봅니다.

석빙고는 1963년1월21일 보물 제3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빙실의 크기는 길이 14.75m, 넓이 5m ,홍예높이 4.4m 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요.

아, 옛날 냉장고 석빙고를 이렇게 마주합니다.

겨울철 강물이 얼면, 얼음을 깨서 저장했겠지요. 무더운 여름날 얼음 한조각이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함을 느꼈겠지만, 일반 서민은 꿈도 못꿀 얼음이었겠네요.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얼음, 그때는 보물다루듯 했을것 같아요.

2012년도에 영화배우 차태현이 출연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얼음을 네모나게 잘라서 새끼줄로 엮어 옮기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청도여행, 하면 떠오르는곳, 청도 와인터널도 있지만 우선 이곳 석빙고와 청도 읍성, 그리고 청도향교까지 둘러보신 다음

와인 터널로 가시면 되겠네요. ^^

그럼 오늘도 즐겁고 편안한 여행하세요.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고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 읍성 봉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하였다.

 

 

청도 읍성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청도 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곳 선정비군의 비석들은 읍성 외곽 서상리, 동천리, 남성현 등 주요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이 있던 주벼 도로가 확장되면서 발견된 비석들을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 2008년 청도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시대는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3기로 모두 30기이다.

 

 

청도읍성에서 가까운곳에 청도 향교가 있어요. 이쪽으로 걸어가면 7~8분정도 소요

답사 팀들이 석빙고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아치형으로 돌을 두르고 그위에 상판돌을 놓은다음, 그위에 흙을 덮어 석빙고의 온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석빙고 내부가 보인다. 약간 기울어 물이 빠져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위험하다고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치형으로

 

 

 

 

 

 

 

posted by 산위의 풍경
2016. 3. 9. 17:12 영화in screen

 귀향이라는 영화는 요즘 마음으로 응원을 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영화관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12살부터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이유도 없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체 두려움을 가지고 도착한곳, 그곳은 일본군위안소였습니다.

아직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한참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인데, 전쟁이란 참상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수 없도록

오직 생존만을 목표로 만드는 공포의 시간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장에 끌려가는 소녀들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라 우리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던 암울한 시대에 각 지역에서 잡혀 동원된

소녀들은 전장터 어디든지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위안부 생활의 비참함은 지금 몇분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주인공 정민이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체 끌려가는 동안 기차에서 만난 소녀와 의지하며 생활합니다.

엄마가 만들어준 괴불노리개를 들고 부적처럼 품안에 품고 공포를 이겨냅니다.

위안소의 소녀들이 가끔 없어지는데, 병들거나 다쳐서 위안부로 쓸수 없을때,

치료를 하러 간다거나 다른곳으로 데려간다더니 그들을 기다리는것은 죽음.

그것도 총살에 죽은 시신에 불까지 지르는 일본군의 만행.

영화로 보는데도 분노가 쌓입니다.

무사히 살아 돌아 올 때까지의 수많은 일화와 시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조용히 영화관으로 발길이 닿게 만드는 영화 귀향, 우리가 알지만 자세히 모르고

또 알지만 잊혀져가는 이야기, 위안부 그들만의 슬픈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민족이, 세계의 여성이 당하고  겪었던 인간적 고통을 함께 나눠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위안부 출신 할머니로 출연하는 손숙, 연극계의 대모가 출연료 없이 런닝개런티도 위안부를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귀향이라는 영화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출연자 누구도 나서지 않는, 그ㅡ들을 보호하려는 제작진과 참여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대구 국립 박물관을 갔더니 국보와 보물이 여러점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군요.

전시실은 고대 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이 있으며, 야외 전시품도 있습니다.

 국립 대구 박물관에 가면 해설사가 이어폰을 다 나눠 주더라구요. 주파수를 맞추면 해설사의 목소리가 잘 들립니다.

해설사를 따라서 전시물을 보며 해설을 들으니까 좀더 의미 있는 박물관 여행이 되었습니다.

박물관 어느곳이나 있는 전시작품 말고, 특별히 보물이나 국보가 여러점 있으니 더욱 신경써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국보 제 182,183,184 금동 삼존불은 귀한 전시물이예요.

또 송림사 오층 전탑 사리갖춤도 (보물 제 325호), 사자(보물제202호),용머리(보물제 1410호)이거는 우리나라에 딱 두점 있는것이라니 희소가치가 더욱 커 보입니다.

또 섬유도시 대구답게 박물관에 여러 복식 전시물이 있는데, 우리나라 의복구조와 발달, 오방색이 왜 있는지 자세히 알게 됩니다.

섬유복식실에 들어가면서 오방색 염색천을 보면서 젊은 엄마들이 " 아고, 천연염색해놨다 그쟈? 예쁘네" 하면서 지나간다고 해요.

오방색은 음양 오행에 기인해서 염색을 하는것이랍니다.

고대 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의 전시물들은 여러점 있습니다만, 그외것들은 다른 박물관에서도 자주 보시는 것이니까,

그것보다는 귀한 보기 힘든 전시물들을 우선적으로 보시길 권해요.

그럼 대구여행때, 꼭 한번 들러보세요. 대구 국립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관람시간

평일: 09:00~18:00

토요일/공휴일:09:00~19:00

토요야간개장(09:00~21:00)-4월부터 10월중 매월 토요일

문화가 있는날 (9:00~21:00)-매월 마지막 수요일

*관람종료시간 30분 전까지 입장할 수 있습니다.

휴관일

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입니다.

▶전시 해설안내

오전 10시, 11시

오후1시, 2시,3시,4시

 

국보제183호, 대좌까지 같이 있는 관음 보살상이라서 가치가 더욱 높아 해외에 전시도 자주 나간답니다.

 

용머리 (보물 제1410호)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 윗부분 장식으로 여의주 뒤쪽으로 도르래가 있어 실용성을 갖췄다고 합니다.

지상20m위에 장식되었을것으로 추정된다 하네요.

 

 

국보 제182호 신라시대

사리함, 가운데 초록색으로 보이는 유리는 그옛날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것이고 그 안에 유곽에 사리가 들어 있었답니다. ^^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갖춤(보물 제325호)-통일신라시대

 

 

 

청자상감 국화무늬 합(이것도 사리함이래요~)

사자 (보물 제202호)통일신라시대 (의성 관덕동)

 

오방색, 음양오행을 나타내는 색.

 

 

 오족도(황제는 칠족도를 수 놓는다고 해요) 임금은 하늘이라 원형을 넣고 신하는 땅을 의미해서 흉배가 네모였대요.

적의본(꿩적사를 쓴다고 해요. 꿩 문양과 꽃무의 보이시죠? 오얏꽃이라고 합니다.)

 

묘족의 복식

행사 대례복(여성)

여자들은 꼭 한번 입으시죠? 결혼할때 폐백복으로~

아기돐복. 옛날엔 돐되기 전엔 흰색옷만 입히다가 돐이 되면, 이렇게 오방색을 넣어 옷을 지어 입혔대요. ^^

앵무복, 암행어사 출또요~~~~~~~할때도 이런옷을 입지요?

겨상도 남자가 무뚝뚝하다는디, 요렇게 자상한 편지가 전해진다네요.

위에는 원본, 아래 흰종이는 위의원본을 다시 써 놓은 것이래요.

 

 

 

 

 

삼층석탑,(고려시대 10세기)

 

토기류와 주먹도끼등 고대 문화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빗살무늬 토기-신석기

 

 태양처럼 생긴 토기는 의식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말모양 허리띠 고리(원삼국시대)

 

 

 

 

 

 

 

 

 

 

 

 

 

나무모양 금동관

 

 

반가사유상

국보 제184호-신라시대(국보 제 182,183호와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금동삼존불)

 

관음보살(신라7세기)-조형미와 예술미가 있는 보물이라 세계전시를 자주나간답니다.

밑의 대좌까지 같이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는 보물이래요 ^^

 

 

posted by 산위의 풍경
2016. 3. 1. 06:00 영화in screen

 윤동주

서시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으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억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영화 동주를 보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시간이었습니다.

필자는 몰랐습니다.

송몽규라는 독립투사를

송몽규라는 시인을

송몽규라는 문학인을.

실로 부끄러웠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고종사촌으로 송몽규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났으므로

한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송몽규는 1917년 9월28일 중국 길림성 회룡면 명동촌에서 태어나

윤동주 시인과 함께 자라며 많은 영향을 끼친듯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암울한 시대적 배경이 흑백영화가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기게 하네요.

모든 젊은이가 절망하고 힘들던 시기에

배움을 세상에 펼치고자 했던 지성인 송몽규,

그리고 문학의 힘으로 일제에 맞서려했던 윤동주.

다소 여성스럽고 여린듯한 시인의 감성때문에

자칫 여리고 힘없어 보이게 비치던 윤동주 시인이

죽는날까지

그야말로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싶어 했을것 같아요.

삶도 닮은듯 다른 삶을 함께 한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호카 감옥에 투옥되며

죽음도 함께 하는 기막힌 운명을 맞이합니다.

윤동주 시인이 죽고 6개월후 독립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움은 말로 다 못하겠지요.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의 삶보다는

송몽규 독립운동가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인 듯 합니다.

3.1절입니다.

영화 동주를 보면서 우리나라 광복이 거저 이뤄진게 아님을 다시한번 뼛속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영화 장면과 겹쳐지는 윤동주의 시가

가슴에 깊이 박힙니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논산의 윤증고택(명재고택은) 실재로 윤증선생이 살지 않은것으로 추정됩니다.

윤증선생이 돌아가시기 3년전 지어졌으며 그의 제자들이 윤증선생에게 존경의 의미로 지어드린 고택이라고 합니다.

윤증고택 바로옆에는 노성향교가 있기 때문에 이곳 마을이름이 교촌입니다.

고택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왼쪽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고 그 대문앞에 향나무로 둘러진 우물이 있습니다.

안채에서 왼쪽으로 돌면 고방이 있는데, 안채의 지붕과 고방의 지붕이 살짝 어긋나듯 비켜 건물이 들어섰는데,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여름의 햇볕은 막고 겨울에 해가 최대한 깊숙히 들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지어진

조상의 지혜가 엿보이는 건물의 배치라고 합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건축한 한옥의 미를 잘 살렸습니다.

그리고 유명인이 찾아와서 가장 탐을 내었다는 장독대, 하루종일 햇볕이 들게 건물 뒤쪽 높게 자리한 장독대가 정갈하니 놓여 있습니다.

안채 오른쪽으로는 사당이 있습니다. 건물 밖으로는 셀수 없이 많은 장독이 있는데, 윤증고택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재 장을 담은 날이면 인근 주변의 사람들이 도우러 왔었답니다.

300년 약장의 비밀은 고택앞 향나무가 우거진 우물에서 찾을 수 있다는데요.

필자가 주부라서 그런지 이런 설명에 귀가 솔깃 합니다.

원래 향나무의 뿌리가 있는 우물의 물은 불순물을 제거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우물물로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고 변하지 않았다고 해설사가 설명해주더라구요.

지금도 윤증선생의 후손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안채를 잘 개방하지 않는다는데

운좋게도 필자가 갔던날 개방해주셔서 곳곳을 구경하였습니다.

역시 집은 사람과 함께 해야 노쇄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300년된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정갈하고 잘 보존되어 집이 생기가 있어 보여서 좋았습니다.

어디 유명하다는 고택을 가보면 대게는 비어 있거나 가끔들러 관리만 하는곳들이 많은데

그런곳은 집이 뭔가 모르게 온기가, 생기가 없어 보였거든요.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윤증고택이 그래서 더 정이 가는가 봅니다.

즐비하게 놓여진 장독이 아름다운 윤증고택이었습니다.

한평생 학자로 살다가신 윤증선생이 제자들이 어쩌면 선생을 닮게 집을 지어 드린듯 싶습니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전형미를 돋보이게 하는 윤증고택앞 연못

 

 

 

 

 

 

 

 

 

 

 

 

 

 

300년 약간장의 비밀, 바로 향나무 뿌리가 있는 우물. 명재고택 우물물입니다.

한옥과 어우러진 장독이 그림같은곳, 명재고택의 아름다움입니다.

 

 

 

 

 

논산 명재고택(구. 윤증선생 고택)

중요민속문화재 제 190호

소재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구 노성면 교촌리306)

시대:조선시대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선생의 고택이다. 고택을 향하여 왼쪽에 장방형의 연못이 있고, 중앙 부분에는 샘이 대지보다 낮게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평면 (멀경)자 형으로 높지 않은 기단위에 사랑마다오가 바깥마당을 주변에 두었꼬, 안채의 남쪽에는 행랑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구조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앞에는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대문의 5칸과 행랑채 일부는 후대에 훼철되어 현재는 개방된 상태이고 건물의 일부는 중간에 수리가 있었으며 그 기법은 18세기이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청, 누마루. 고방등의 짜임색 간결하고 품위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대체로 중부지아 양식을 따르면서도 남도풍을 가미한 특이한 형태이다. 사랑채 앞의 축대와 샘, 연못과 나무에는 조선시대 정원의 아름다움이 스며 있으며, 뒤안의 장독대와 울창한 숲은 우리나라 살림집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우리 지방의 양반가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