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는 설악산 산행때마다 지나가보기는 여러번 했는데, 실제로 들러본적은 없는것 같네요.
이번 토왕성 폭포 산행을 마치고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른 산악회원들 기다리는 시간에 남편과 둘이서 둘러 보는 시간이 생겼네요.
우선 신흥사 입구에 커다란 좌불상이 있는데, 이 불상 본체안에 또 불상이 있더군요.
불상을 마주본 방향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어요. 그곳에 들어가보면 불상을 만나시게 된답니다.
신기했어요.
이곳을 본후 천천히 걸어서 신흥사쪽으로 가 봅니다. 사대천왕문안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보제루를 통해 사찰로 들어서게 되는데,
기둥하나로 말해주는 신흥사의 역사를 보는것 같습니다.
설악산의 모습과 절집 지붕이 만나는 모ㅡ습은 굉장한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불교에 대해 잘 모르고 또 절집 에절도 잘 모릅니다만, 그저 둘러 보는 방문객 입장이라도 대단한 신흥사의 모습을 바라다 봅니다.
신흥사가 이렇게 오래된 사찰인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진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의상대사가 중창하고 조선시대 여러차례 중창되었다고 하네요.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합니다.
신흥사 절내는 한참 돌아다닐만 합니다.
주변에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어서 산책하기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http://www.sinheungsa.kr/ 신흥사
雪嶽山 新興寺 由來
이 가람은 신라(新羅) 진덕여왕 6년(서기652)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 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인데 중향성(衆香城)은 금강산(金剛山) 철위산(鐵圍山)을 의미하며 불토국(佛土國)은 부처님께서 교화 할 대상적 국토라는 의미와 정치적 형태의 국가라고 하는 뜻과 어울린 말이다.
처음 향성사지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에 세워져 46년간 존속하다가 효소왕 7년(서기 69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당시 9층이던 향성탑이 현재 켄싱턴호텔 앞에 3층만 남아 있어 옛 향성사의 역사를 말해주듯 옛날을 잊지 않게 하고 있다.
향성사가 화재를 당한지 3년 후 의상조사께서 능인암(현재 내원암)터에 다시 중건하고 사명(寺名)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개칭 하였다. 그 후 946년간 수많은 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여 왔으나 조선 인조20년(서기1642)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2년후 영서(靈瑞), 혜원(惠元), 연옥(蓮玉) 세분의 고승들께서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 말씀 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奇瑞)를 얻고 절을 중창하니 지금의 신흥사이다. 절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吉地)를 점지해 주어 흥왕(興旺)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한 것이다. 6·25사변때 고성군 건봉사는 전소되었고 영북지역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었을 무렵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원력으로 여기 신흥사를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게 되었다. 이후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불사를 전개해 나갔다. 속초노인복지관을 개관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춘천에는 불교방송지국을 개국하여 포교에 전념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신흥사가 과거의 신흥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흥사가 되었다며 신흥사(新興寺)의 귀신 신자(神字)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字)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사명(寺名)을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신흥사 홈페이지의 신흥사 소개
| | | |
|
사찰의 구조물들에는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 |
다.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통해 |
우리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
나아갈 수 있게 점층적 인 구조를 가지고 배열되 |
어 있습니다. 사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승원 |
(僧院)과 당(堂)입니다. 당은 일반적으로 사원의 |
중심이 되는 불당(佛堂)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
말로는 ‘금당(金堂)’ 또는 ‘법당(法堂)’이라고 합 |
니다. 그러나 본래 당이라는 것은 불상을 봉안한 |
불당이 나 법당뿐만 아니라 경전을 보관하는 장 |
경각(藏經閣)과 강 당(講堂) 등도 포함하고 있습 |
니다. | |
또한 불당은 불상을 봉 안하고 불교의 각종 행사를 봉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강 당은 경과 율을 강설하고 연 |
구하는 장소입니다. 우리 나라 의 전통적 사찰구조는 탑을 중심으로 건축물이 배치되었다 고 합니다. 그리고 |
그 건축물들의 이름은 그곳에 모셔진 부 처님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습니다. |
우리 나라 전통의 사찰 구조는 탑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 거나 주요 건축물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그 각 전 에 |
모셔진 불상에 따라 그 전(殿)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찰의 문- 일주문은 산문(山門)이라고도 하 는데, |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 절 이름 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일주문에 들어 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이 곳을 기준으로 승(僧 |
)과 속(俗),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생사윤회의 중생계(衆生界)와 열반적정의 불국토(佛國土)가 나누어 |
집니다. 절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정문이며, 경내(境內)와 경외(境外)를 구분하는 문이기도 하다. |
양쪽에 기둥을 하 나씩만 세워서 만든 문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절에 따라서는 양쪽에 기둥을 하나 |
이상씩 세운 것도 있으므로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건축물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 할 |
것 같습 니다. |
어쨌든 이 일(一)이라는 것은 불교의 진리를 나타낸 일승법(一乘法)이라고 이해하면 될 줄 압니다. 일주문에는 |
`OO山 OO寺'라고 산의 이름과 절의 명칭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 |
| | | | |
|
| |
|
설악산 신흥사 통일대물 내원 법당
신흥사 극락보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이 건물은 신흥사의 중심 전각으로 조선시대인 1647년 (인조 25년)에 지었다.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의 주인공인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봉안하는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을 지닌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다.
그래서 무량수불 부량광불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아미타신앙이 성행하였고 많은 사찰에 극락보전. 무량수전 또는 미타전이 들어서 아미타불을 봉안 하였다.
고통의 바다에 살고 있는 무릇 중생은 누구나 지극한 행복을 원하다. 이 지극한 행복을 극락 또는 안양이라 하는데 누구나 올바룬 깨달음을 통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아미타불이시다.
신흥사 극락보전은 창건후 1750년(영조26년)과 1821년(순조21년)에 각각 중수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건물의 크기는 190㎡로서 목조와가 이며 원형보존이 잘 되어 있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관세음보살과 우측에 대세지보살을 함께 아미삼존상을 봉안 하여 극락세계의 광경을 나타냈다.
신흥사 극락보전 안내문에서.............
신흥사 보제루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1770년 (영조46년)에 세워진 것으로, 장대석으로 2단 쌓ㅇㄴ 기단 위에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선방과 요사채로 둘러싸여 있는 마당을 둘러싸 사찰 중심 영역의 공간성을 확보해 준다.
건물의 하부는 기둥으로만 구성된 열려 있는 공간으로 극락조전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커진 모습을 보여주느 보제루 내에는 법고와 목어, 대종, 경판이 보관되어 있고
몇몇의 현판과 중수기가 걸려 있다. 이 주에는 이 사찰이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보여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제로 안내문에서.
신흥사의 꽃살이 너무 예쁘다.
신흥사 사대천왕문
신흥사 부도탑
신승사 부도군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6년(65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라 불렸으나 효소왕10년(701년)에 의상대사가 중건하고
선정사로 개칭 하였으며 조선인조 22년(1644년)에 사찰을 중건하고 신흥사로 개칭 하였다.
부도군에는 모두 17기의 부도가 있는데 원당형이 7기이고 석종형이 10기이며 부도명이 있어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것이 12기이다.
부도와 함께 6기의 비석이 있는데 모두 1779년부터 1827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이곳의 부도는 모두 조선 후기의 것으로 신흥사 중창이후 역대고승들의 부도가 단일 장소에 집중된 전형적인 부도군이다.
설악산과 어우러진 신흥사 경내,
신흥사 삼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