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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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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여행을 떠나면 지금쯤 가장 예쁜곳이 오리장림 자천숲입니다.

시원스런 생명력이 나무의 수명만큼이나 샘솟아 오르는 곳입니다.

그 근처에 있는 두곳,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곳, 자천 천주교 공소와 자천교회가 이웃하고 있는 곳입니다.

지난번엔 화북면 자천 공소 천주교 교회를 소개했었는데, 오늘은 자천교회를 가봅니다.

한옥에 교회가 있으니 신기하더군요.

기독교 사적 제2호 자천교회는 1903년에 시작된 교회입니다.

예배당을 보면 정면 강단을 향해 벽으로 나눠진 여자석 남자석 예배석이 따로 있어요.

남녀칠세 부동석, 지금이야 무슨말이야 하겠지만 옛날에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우리나라에

예배당에서도 저렇게 자리를 구분하였으니 이땅에 신 문물처럼 들어온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 하는 반증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한마을에 이런 종교적 건물이 이웃해 있는것도 신기합니다.

영천 화북면에 명소, 가볼만한 곳으로 자천숲과 자천교회, 자천공소 천주교 교회를 빼놓지 마시고 들러 보세요.

 

 

 

 

 

 

 

영천 자천교회: 이 교회는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이 신자들과 합심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드믄 한옥교회이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의 우진각 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측면에 두었다. 내부는 후면의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 석을 구분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선교 초기에 구미인 선교사들이 지은 한. 양 절충식으로 개신교사와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천교회 안내문에서...

영천교회 내부" 정면 강단에서 바라보면 가운데 벽을 사이에 두고 남녀석이 구분되어져 있다.

 

 

 

의자옆에 벽 보이시죠? 정면 강단을 향해 벽으로 구분되어져 있는 남녀 예배석.

영천 자천교회 한옥교회 모습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장로의 묘가 교회 화단에 조성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 사적 제 2호.

영천 자천교회앞 잔디밭,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신성학당

 

 

 

 

봄의 기운을 가득 품은 영천 자천교회

자천마을 고헌천 주변의 아름드리 나무. 근처 오리장림에도 이런나무가 많다.

 

길 나그네의 휴식처로 이만한곳이 또 있을까?

 

posted by 산위의 풍경

 

군생활하고 있는 아들 덕분에 요즘 영천시에 자주 가게 됩니다.

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느라 여행도 같이 하고 말입니다.

이번엔 영천시 자천마을에 있는 영천성당 자천공소를 가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영천 자천교회를 가다가 만나게 된 자천공소.

공소라는 곳은 학교로 치면 분교처럼 본 학교가 있고 분교가 있듯이 성당이 있고 지역에 공소가 있답니다.

자천 교회를 가다가 만난 한옥으로 생긴 예쁘고 깔끔한 영천성당 자천공소가 너무너무 맘에 들더군요.

자천교회는 근대문화재 신청을 해서 영천시에서 홍보도 하니까 잘 알려졌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의 종교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영천성당 자천공소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천마을 공소는 영천성당이 생기기전 교리공부를 하면서 미사를 올리던 곳입니다.

이곳도 80여년쯤 된곳인데, 사람들이 자천교회는 알아도 자천 천주교 공소를 모르더군요.

공소에 교리및 미사를 보았던 옛건물은 백년은 되어보이는 건물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소가 자리잡은지는 100년은 못되었지만, 건물의 나이는 공소시작 나이보다는 훨씬 많으니까요..ㅋㅋ

풍경이가 방문했을때, 두분의 신자분들이 열심히 설거지 중이셨어요.

아주 친절하시고, "죄송하지만 성당 사진좀 찍어도 될까요? " 했더니 아주 친절하게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공소앞 반송이 한그루 있는데 아주 예쁜소나무입니다.

그리고는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공소와 한옥 두채, 새로 간이건물로 지은 식당같은곳이 있지요.

자천공소를 보고나서 알아보고 싶어졌어요.

아래의 연두색 박스안의 글은 다시래기님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이랍니다.

아주 자세하게 자천공소에 대해 알고 계셔서 저도 거기서 좋은 정보를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박해의 시기에 굳건한 믿음으로 작은 공소를 지켜내고, 십시일반 모금과 헌금으로 공소건물을 확장해 내셨네요.

영천시 자천교회를 찾으시는길이라면 5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천주교 자천공소도 꼭 들러보세요. ^^

1926년 5월 대구에 살던 노반석(가밀로)형제가 이주하며 전교와 함께 설립하였는데, 처음에는 자천3리 714 번지와 715번지 초가 두채를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다.

1927년 용평본당 2대 주임 유흥모신부님이 질구지 공소를 폐쇄하고  자천으로 옮겼으며 10년후인 1937년 영천본당 초대 주임이신 조레이몬드푸르다드보 신부님이 용평본당 소속에서 영천본당으로 옮기셨다.

1940년 죈부님이 500원, 교유들희 헌금 300원, 전 공소 매각대금 60원 , 서병훈씨 회사금 100원으로 성전기금을 마련하여 서병훈씨 소유이던 1806번지소재 기와 두 채를 900원에 매입하여 공소를 이전하였다.

공소 종댓와종은 정마리아가 기증하였으며, 그후 1943년 공소 밭 177평을 기증하였다. 1942년 신자수가 증가하자 본당으로 승격되어 최재선 신부님이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3개월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를 구실로 영천경찰서에 투옥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2월에 석방되어  곧바로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 보좌로 전임되자 자천본당은 다시 공소로 환원된다.

최신부의 구속이후 일본 경찰은 공소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했으나 이윤영(바오로 ,제3대)회장을 비롯한 신자들은이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종을 수호하며

더욱 신앙생활을 공고히 하였다.

주일마다 경찰의 집회 허가를 받아가면서도, 19년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공소예절을 계속하며 지역선교에 열중하였다.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으나, 1950년 6.25사변을 거치면서 종댓와종이 폭격으로 소실되는등 막대한 신앙의 상처를 받기도 하였다.

공소의 소나무는 1962년에 심었고, 1963년 2월 최봉도 신부님이 8개월간 사목하다가 신녕공소로 가셨다....

http://blog.daum.net/fireball/15951541

다시래기님의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삼국의 수리시설이라고 한다면 제일먼저 떠오르는곳은 벽골제일 것입니다. 벽골제는 백제시대 330년경에 축조된것으로 알려지고

워낙에 큰 저수지다 보니까 호남, 호서라는 특이하게 지역 명칭이 생겨날 정도로 거대한 저수지입니다.

우리나라 저수지의 시조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요.

오늘 가본곳이 저수지라서 이렇게 장황하게 벽골제이야기를 시작 했네요.

크기야 벽골제만큼은 아니지만 세월만큼은 견줄만한 청제못.

벽골제보다200년정도 뒤에 만들어진것 같습니다.

이곳은 경북 영천에 있는 못입니다.

신라시대 법흥왕때 만들어진 수리시설이라고 하니 정말 오래된 수리시설입니다.

옛날 농경사회에는 벼농사가 굉장히 중요한 통치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석기 시대부터 농사를 시작하여 벼농사를 짓게 되고 그 수확물의 양에 따라 지배구도가 달라졌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농사가 근본이 되는 시대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사회구조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농사가 가장 기본이 되는 생활이었으므로 농사는 국가의 중요한 재무구조가 되었겠지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수리시설 청제못은 지금도 영천  청제못 주변의 중요한 용수원이라고 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수리 시설이 면면히 이어져 오며 그 쓰임새가 아직까지 유효하다니 신기합니다.

그 터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용되어 오고 있는것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보물 517호 청제비가 있는곳, 청제못이 있는 영천에서 전해 드렸습니다

영천 청제비

보물 517호.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 7-1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있는 양면비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cm폭94cm 두께 16cm이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면에는 병진년 법흥왕 23년 536년의 간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 14년 원성왕 14년, 798년 절대 연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하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 시설과 관련이 있는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에 숙종 14년 1688년에 세워진 청제중립지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 4년 1653년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이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 사람이 다시 세웠다. 는 내용을 적고 있따.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 삼신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제비 안내문에서.... 

 

 

 

 

 

 

 

 

 

영천 청제( 경상북도 기념물 제 152호)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437-1외 필

 이 저수지는 보물 제 517호 영천 청제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 법흥왕 23년 이전에는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종 지지류, 청제문부 등의 자료를 통해 수차레의 수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이쓰며, 신라 시대에 축조된 수리시설 중 현존하는 최고의 제언 중의 하나이다.

현재 재방 길이는 243.5m이며 높이는 12.5m로 흙으로 쌓은 저수지이다.

저수지 면적은 110,000이고 저수량은 약590,000ton이며 현재도 이 지역일대의 중요한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제 안내문에서.-

 

 

 

청제못에서 물 내려가는 곳은 바위를 깍아 물길을 낸듯 암반을 타고 물이 흐르고 있다.

 

 청제못 물 내려가는곳. 암반 사이로 물길이 있다.

 

 

 

 흙둑을 쌓아 만든 청제못 둑방

 영천 청제비 (보물 제 517호-1969.11.21지정)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 7-1

 

 

 

 

posted by 산위의 풍경

경주 가볼만한곳, 봄에 가볼만한 여행지로 양동마을을 꼽았습니다.

산과 어우러진 마을은 고스란히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양동마을입니다.

16세기로 돌아간듯한 정말 시간여행을 하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곳, 양동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사대부의 생활공간부터 양민들의 집, 공부했던곳, 제사를 모시던곳, 휴식을 취했던곳, 어느곳 하나 문화재 아닌곳이 없듯이

한 마을이 통째로 세계문화 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라니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서 애 많이 쓰셨을듯 합니다.

우리나라가 격변의 시대에 외세에 침략도 많이 받았는데, 온전한 우리것을 지켜온 이마을분들이 정말 대단한것 같습니다.

 다른곳은 다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겠지만  정충비각 만큼은 눈에 띕니다.

왜나면, 이곳은 주인에 대한 충절을 기념해서 정조대왕이 내린 비각이라니 말입니다.

노비를 위한 비각이 있는곳이라 더욱 시선이 갔습니다. 인조때 병자호란으로

전쟁에 나간 손종로와 그의 노비 억부는 경기도 이천 쌍령전투에서 전사를 하였는데

  시신를 찾지 못해 옷가지로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정충각은 손종로를 기리는 비각이고 충노각은 노비 억부를 기리는 비각이라고 합니다.

양동 마을은 초가지붕 단정하게 손질하고 봄 손님 맞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앞다투어 피는 봄꽃과 함께한 여행지, 경주 양동마을이었습니다.

많이 걸어야 하는 여행지입니다. 편안한 복장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줍니다. ^^

 

 

 

 

 

 

 

 

 

 

 

 

 

 

 

 

 

 

 

 

 

 

 

 

 

 

 

posted by 산위의 풍경

 

한국의 소림사라고 할까요?

경주에 있는 골굴사에 가보면 선무도 총본산이라고 하네요.

1500년전의 불교유산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바위를 파고 만든 곳곳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지장굴, 라한굴,약사굴, 금강약수, 관음전,산신당등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보물 제 581호 마애여래좌불상이 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모습이 웅장하고 섬세하며 포근해 보입니다.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가장 오래되고 찬란한 신라의 불교문화 유적입니다.

불국사보다 200년 앞선 사찰이라고 합니다.

 

 

 

 

 

 

 

 

 

 

 

 해골같은 바위

 마애여래좌불상 보물581호

 

 

 

 

 

 

골굴사는 약 1500년전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암반전산의 마애여래불과 12처 석굴이 목조전실로 조성된 아름다운 석굴 사원이었다.

조선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골굴 석굴도와 정시한의 토함산 산중일기에 그 당시의 모습이 전해져 오고 있다.

약 300여년전 화재로 전소되어 유적만 남아 있으며 전설과 더불어 많은 불교학자들이 신라 원효대사의 열반지 혈사로 추정하는 골굴암은 원효대사의 후손인 설적운 스님

이 기림사 주지를 역임하고 1990년 이후부터 현재 가람으로 중창하였다. 오늘날엔 승군의 전통무에인 선무도 총본산으로서 국내외에 수많은 지원을 개척하며 원효성사의

가르침을 전 세계인들에게 포교하고 있다.---골굴사 연혁에서

 

골굴사 홈페이지 http://www.golgulsa.com/

 

굴골사는 선무도 수행도량으로 유명하며, 원효대사가 열반한 혈사로 추정되는 곳이다. 입적 이후 가장 이른시기에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고선사서당화상탑비에 의하면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6년)70세로 혈사에서 입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살던 혈사에서 가가운 곳에 아들 설총의 집이 위치했떤 곳으로 보아 그 위치가 신라 왕경에서 멀지 않은 경주 남산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골굴사 굴에 모셔진 불상들을 만나려면 아슬 아슬한 좁은길을 마다않고 지나야 한다.

금강약수는 생각보다 많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여서 먹을 수 없었다.

 

약사굴 연꽃위에 앉으신 석불이 모셔져 있다.

 

마애여래불좌상(보물581호)

산신당

남근바위

 

 

 

 

 

관음전

건물모양 같지만, 안에는 자연 동굴로 이루어져 있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