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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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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대표적 작가중 한분 요산 김정한 선생의 문학관을 찾아가 봅니다.

기장에서 가려면 36번 버스를 타고 연산 교차로까지 가서 1호선 지하철을 갈아 탑니다.

범어사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면 요산 문학로가 펼쳐져 있습니다.

출구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오른쪽도로 요산문학로를 따라 걸어갑니다.

900여미터를 걸어가면 됩니다.

요산 문학로를 걷다보면 금정중학교와 청룡초등학교가 있는데 범어사 경내에 있으면서 범어사에서 운영하던 사립 명정 학교가

분리된 것이라고 합니다.

요산 선생이 12세때에 다니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을 지나면 요산 선생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말씀을 벽화에 그리고 작품 설명과 벽화를 보면서 걸을 수 있습니다.

요산 문학관은 언덕에 있습니다.

도착해보니 사무실 직원 한분만 있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학관 전체를 풍경이 혼자 차지한 기분이었습니다.

1908년~1996년 89세로 타계할 때까지 부산을 지키던 작가입니다. 1931년 24세때 일본 유학중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던 잡지 『학지광』편집에 참가했으며 『조선시단』『신계단』등에 시와 단편 소설 발표했는데 이때 단편소설 『구제사업』은 작품 제목만 실리고 내용은 전문 삭제를 당했다고 합니다.1932년  12월에 처녀작 『그물』을 <문학건설> 발표했다고 합니다.

등단은 1936년 요산 선생이 29세때 『사하촌』이 <조선일보>신춘 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을 쓰기위해 우리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당시 한글사전이 없었음) 우리말 낱말 사전과 식물도감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이후 <우리말>이란 제목의 노트 8권과 <식물연구>라는 제목의 노트 2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부산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셨으며 1949년에는 부산대학교에 출강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1950년 부산대학교에 조교수로 발령 받았는데 6.25발발로 보도연맹 가입자들에 대한 구금을 피해 엄궁동으로 피신중 체포 되기도 하셨답니다.

---위의 내용은 요산 선생의 연보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요산 문학관은 전시실과 부대시설이 있습니다.

1층은 세미나실이 있어요.

2층은 전시실과 도서관이 있더라구요.

3층은 창작실로 방문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습니다.

지하1층에는 강당이 자리했습니다.

요산 선생의 대표적 작품을 살펴보면

1936년에 발표한 『사하촌』1936, 『모래톱이야기』1966, 『수라도』1969, 『뒷기미 나루』1969, 『인간단지』1970, 『사밧재』1971, 『산거족』1971,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1977년등이 있습니다.

요산 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요산 선생이 태어난 동래구 북면 남산리는 예부터 김해 김씨(삼현파)집성촌이었다고 하네요.

본향이 경북 청도인 선조들이 이곳으로 세거한 때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로 16대조 김일손이 참화를 입은 후랍니다.

조부 대에 와서 종가가 되고  선생이 떠나시고 후배 작가들과 뜻있는 사회 인사들이 생가복원 이야기를 시작해 부산 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그 해 12월 퇴락한 집을 헐고 2003년 6월에 공사를 마무리 했대요.

요산 선생의 작품 『수라도』1969년 발표되었는 한말부터 광복까지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진사댁 가족사와 한민족 수난사를 실감있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모래톱이야기는 1966년 발표되었는데 작가가 25년 침묵을 깨고 발표한 작품으로 일제시대부터 낙동강 하루 소작농민의 애환을 그린 작품이예요.

장편 삼별초는 고려 1014년 현종5년부터 1273년 원종 14년까지 월별로 구분해 사건별로 기록해 연표를 작성할 만큼 대단한 자료 수집을 하셨어요.

1970년발표된 독메는 외따로 떨어진 조그만 산이라는 순우리말로 고립촌락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답니다.

국유지 불하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소설이라고 합니다.

사밧재는 1971년 발표되었는데 일제말 배경으로 창씨개명과 학병지원문제를 통해 민족의 저항성을 보여주는 점에서 수라도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하네요.

이참에 요산 선생의 작품에 대해 알았으니 통째로 다 읽으려고 전집 장만을 하려고 주문해 두었답니다.

일부 작품만 읽어서 아쉬웠거든요.

 

말년에 천주교 신앙을 가지셨답니다.

사전이 없을 당시 요산 선생이 만든 낱말 카드.

량이 엄청났습니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11월18일  국제신문에서 개최하는 근교산 1000회 기념산행에 참가를 했답니다.

다른곳을 가는곳보다, 부산을 대표하는 금정산을 함께 걸어 본다는데 의미를 두고 참여해 보았습니다.

초대된분들은 50인 한정이었습니다만, 관계자분등해서 인원은 조금더 되는듯 합니다.

근교산 책과 스카프, 도시락을 받고나서 산행을 시작하지요.

바로 산성마을에서 시작하는 산행길은 그렇게 힘들이지 않는 부드러운 산행이랍니다.

산행들머리까지는 온천장전철역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203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되었습니다.

약간 날씨가 흐려서 걱정이었는데 비가 내릴듯 꾸물꾸물되는 날씨였습니다.

국제신문사 산행대장님과 근교산 담당 기자등, 전에 담당했던분들도 참여해서 의미있는 산행이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산행하셨던 분들도 여럿 눈에 띄어서 무척 반가웠고, 남편을 처음 보는 분들도 있어서 서로서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산성로를 건너 올라가는길, 낙엽길처럼 제대로 만추를 즐겼습니다.

미륵암에 도착했을때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절집에서 소리를 내면 불경한데, 안개낀 절집에 노란 은행잎이 마당 한가득 깔려 있었습니다.

금화가 가득한 절집 마당에서 감탄사 연발이었답니다.

전에도 미륵암에 갔었는데, 그때는 꽃살을 못보았는데 이번에 보니 꽃살이 있었군요.

미륵암을 지나 다시 걷습니다.

힘든코스는 없는 부드러운 산길이라 다같이 걷기에 좋은곳이네요.

신랑과 같이 걷는길, 남편은 봄에 다시 오자면서 걷기 좋은길이라고 엄청 좋아 합니다.

그렇게 올라가서 점심을 먹는데 살짝 빗방울이 들고 찬 도시락은 한기를 느끼게 합니다.

식사 마무리를 하고 단체 사진 기념으로 남깁니다.

정상 고당봉을 향해 올라갑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조망은 할 수 없습니다만, 안쉬운대로 그저 안개의 정취를 느껴 봅니다.

산행대장님의 안내로 금정산 금샘을 지나 남근석을 보고 범어사로 내려섭니다.

범어사으로 내려서는길은 아직 단풍이 남아 있어서 또다른 가을모습을 만납니다.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도 보고 근교산 1000회 기념 산행을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근교산 1000회 축하드립니다. 국제 신문사에서 20년 넘게 산행 가이드를 내주어서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산행지 함께 하겠습니다.

 

산행지 석문을 지나면서~

 

 

 

 

 

미륵암 절 마당 가득 금화가 깔렸다....................은행잎

 

 

 

 

 

절집 댓돌위에 자리한 백구

 

 

 

금정산 정상 고당봉

 

금정산 금샘

 

금정산 남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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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즐기기

해운대는 해운 최치원과 뗄수 없는 곳입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사람으로 중국에까지 그 문장 실력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가야산이 있는 합천으로 향하던중 마지막 머물렀던 동백섬,

바위에 새긴 해운대 글씨 때문에

이곳의 지명이 해운대라 불렸다고 합니다.

동백섬에는 최충원 유적지가 있습니다.

해운정과 최치원 선생의 동상,  동상 주변에 최치원 선생의 한시가 있으며

조선호텔앞 해운대 선각이 된 바위가 있습니다.

왜 해운대를 갔을까요?

정말 부산에 살아도 해운대 해수욕장에 가서 놀 생각을 안합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스터디 팀원들과 해수욕장 앞 콘도를 빌려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네요.

아침 8시쯤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나가니까

사람이 없고 조용한데다 바다까지 깨끗하고 예뻐서 우리끼리 열심히 놀았습니다.

또 국문학도답게 해수욕장 모래길을 걸어서 동백섬까지 걸어가면 정상쪽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동상과 해운정이 있습니다.

큰 나무의 그늘은 너무나 시원합니다.

살살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끈적이지 않고 시원하네요.

최치원 선생동상에 들렀다가 다시 바닷가를 걸어갑니다.

해볕에 부서지는 윤슬, 반짝이는 햇살의 조각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바닷물이 차지않고 미지근 합니다.

퐁당퐁당 해수욕장에서의 놀이~ 신납니다.

이번, 여름에 어디로 여행을 떠나셨나요?

익숙하지만,  가지 않던 해운대 해수욕장, 신나는 여름을 만끽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해운대 해수욕장 200% 즐기기

해수욕과 해변걷기, 그리고 문학기행으로 최치원 유적지 둘러보기를 한다면

더 즐거운 해운대 여행이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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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에 참 괜찮은 카페가 있네요.

사실 기장에 살면서 저도 몰랐네요.ㅜ,ㅜ

일광 해수욕장 갯마을 축제에 갔다가 들러봤던 카페 에스페랑스

이벤트 광장 있는 바로앞에 자리한 에스페랑스.

요즘은 베이커리 카페가 대세인듯 해요.

카페 에스페랑스는 희망과 기대라는 뜻이래요.

커피도 다양하고, 원두는 예가체프나 브라질커피원두를 브랜딩해서 아메리카노에 사용한다네요.

로스팅도 전문적인 제이로스팅에서 같이 합니다.

에스페랑스안에 있어요.

저는 해수욕장 한바퀴 걸었더니 무지무지 땀나고 힘들어서요~

달콤한게 땡겼어요. 살짝 피곤하니까.

그래서 호두타르트와 블루베리스무디를 시키고용~

시원하게 드링킹~ 마시고 호두타르트는 다 못 먹어서 포장해오는 알뜰함.ㅋㅋ

나오려는데 점장님이 "이층도 있어요." 하십니다.

당연히 카페 구경하러 2층도 올라갔지요.

오~

인테리어 독특합니다.

목재를 굉장히 다양하게 인테리어한 카페 내부가 포근 포근 정감있어요.

가만 앉아서 독서하면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담엔 책한권 들고가서 구석자리 짱 박혀서 독서하고 싶드라고요.ㅋㅋ

있지용, 대문을 테이블로 사용했더라구요.

옛날 대문 아시죠? 나무로 된, 꽃장식 박혀 있는 그런거.

아............ 낡은대로의 질감이 저는 엄청 좋았어요.

이층에 헉.....이곳에서 드라마 딴따라를 촬영했었어??? 깜짝 놀랐네요.

드라마 재밌게 봤는데, 이곳에서 촬영되었는지 몰랐어요.

지성씨, 혜리, 채정안씨 , 강민혁 등등 유명스타들의 싸인이 되어 있구요,

드라마 촬영시 사진들도 있네요.

지성씨가 앉았던 자리, 혜리가 앉았던 자리찾기도 재밌겠어요.

카페 에스페랑스, 기장여행 중 들러보면 좋을 카페예요.

일광 해수욕장 찾아가시면 됩니다. 에스페랑스에서 만나요~

 

 

 

 

 

호두 타르트와 블루베리 스무디

 

 

 

 

 

 

 

 

 

 

 

 

에스페랑스 카페 뒤쪽, 로스팅 하는곳이지요. ^^

 

 

 

 

 

 

 

 

 

 

 

 

로큰롤 할배 이장희 싸인

 

 

 

핸드드립 커피 주문고객 자리랍니다.

 

카페안에서 일광 해수욕장이 바로 보여요.

이벤트 광장 바로 앞입니다.

 

 

 

 

 

에스페랑스 카페는 목재를 굉장히 다양하게 사용한 인테리어가 특징이네요.

옛날 사대부 집안의 대문도 테이블로 쓰이고요~

독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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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하는날, 영화를 보러 동부산 롯데시네마에 갔습니다.

더위도 식힐겸 극장 나들이는 여름 최고의 피서인것 같아요

저렴하게 조조영화, 물론 오후에 다른 스케줄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타이틀, 그리고 일본강제점령기시

가장 비참했을 불운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외동딸, 후궁으로 간택되지 않은 양씨가 나았다고 일제는 황실족보에도 올려주지 않으려 했었답니다.

13살에  신여성교육을 시킨다는 명복으로 강제로 일본유학길에 오르는 황녀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것 같아요.

일본땅에서도 선전 선동에 끌려다녀야만 했을 황실의 일가.

한나라의 왕실 사람들이 일본의 강제 점령기에 끌려가 말할수 없는 수모를 겪었을것 같습니다.

물론 나라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무력하게 했다는 비판도 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의 통치가 강력하고 국권을 지켰다면 일본 강제점령기 35년은 없었을 것입니다.

안이하고 약한 황실은 황실뿐아니라 온 나를 비탄에 잠기게 했습니다.

똑똑하고 아름다웠다는 덕혜옹주는 황실의 자존심, 비참함에 정신을 놓치 않고는 살수 없었을것 같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독립군, 황실을 지키기위한 그들의 애국정신, 그러나 쉽사리 조선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일본 생활중, 일본황실의 일가에게 강제 결혼당하고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남편에게 버림받는 기구한 운명,

늦게나마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말년을 낙선재에서 보냄을 다행으로 여겼을까요?

온전한 정신일때 썼다는

'오래오래 낙선재에서 살고싶어요,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고 썼다고해요.

영화가 끝난후 크레딧이 오를때, 이 글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황녀로서 사랑으로 키워지던 옹주가 어느날 갑자기 일제감점으로 죽음의 공포앞에 놓여져 살아야만 했던 운명,

영화는 잔인했던 시대를 보여주는 거울같습니다.

이영화를 위해 여주인공 손예진 10억울 투자했다고 하던데,

일제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던 독립군들, 8.15광복절을 맞이해서 더욱 뜻깊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덕혜옹주, 놓치지 마세요.

 

 

posted by 산위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