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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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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천박물관 근처에 볼일이 있어갔다가
금귀고리 전시회가 열린다는걸 알게 되었 습 니다. 입장도무료이고 약속시간보다 좀이른 시간이 라서
전시회장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의 고분 에서 발견된 금귀고리 들이 각 나라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나누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금세공기술이 요즘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정말 정교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역시 손재주가 좋은 조상님들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귀고리 들을 볼수 있네요 장식적인 것뿐아니라 신분을 나타내거나 어떤 행사용으로 착용했던 것 같아요. 대단히 크고 복잡한 모양으로 봐서 말입니다.
이렇게 한자리에서· 삼국의 것과 가야, 고려에서 조선까지 살펴볼수 있는 것에 놀랍습니다. 가까운 곳의 복천박물관, 들러보셔서 우리 선조들의 예술성, 그 뛰어난 솜씨에 감탄 해 보지 않으실래요?

posted by 산위의 풍경
2012. 2. 29. 19:15 산 그리고 사람

요약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봉수대.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부산문화재자료 제2호
지정일 1995년 12월 15일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 52
시대 고려
종류/분류 봉수대
크기 면적 28,185㎡, 봉돈 지름 2.4m, 둘레 9m
기장 남산 봉수대 /
본문

1995년 12월 15일 부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봉대산의 가장 높은 곳에 돌로 둥글고 높게 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뾰족한 산봉우리처럼 만들어져 멀리서 봐도 모습이 수려하다. 985년(성종 4)에 설치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면적은 28,185㎡이고, 중앙의 봉돈은 지름 2.4m, 둘레 9m의 돌로 쌓여 있다.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

경상도 지역의 봉수망 중 간봉 제8호인데, 왜적의 침입을 제일 먼저 알리는 곳으로, 남으로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장산의 남쪽 산봉우리에 있는 간비오 봉화대에, 북으로장안읍 임랑리 뒷산에 있는 임랑 봉화대 및 이길 봉수대로 연락하였다.

불빛과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가 정해져 있었고, 궂은 날씨 때문에 신호가 불가능하면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가 릴레이식으로 다음 봉수대에 알렸다. 봉수대의 봉군은 200명이며, 봉수군의 직제는 도별장 1명을 두고, 그 밑에 다시 별장 5명~10명, 감고() 1명, 봉군은 1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봉수대는 나라에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하여 군사정보를 중앙으로 알리는 옛 통신시설이다.

기장남산봉수대
기장남산봉수대
발굴조사전경
발굴조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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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명 칭 기장남산봉수대 (機張南山烽燧臺)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통신/ 봉수
수량/면적 1기 28,165㎡
지정(등록)일 1995.12.15
소 재 지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52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부산광역시
관리자(관리단체) 기장군
상 세 문 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문화관광과 051-709-4062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이 봉수대는 중앙의 봉돈은 지름 2.4m, 둘레 9m의 돌로 쌓여 있으며,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 남쪽으로 해운대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 임랑 및 아이 봉수대에 연결되어 있다.

고려 성종 4년(985)에 설치하였으며,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 때 현대적인 전화 통신체제로 바뀌면서 폐지되었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문화재청에서-----발췌함



신문기사에 난지 몇달이 지난후 가본 남산은 상처투성이로 방치되어 있었다.
언제쯤 원형대로 복원이 되어 상처가 아물까?
고려시대의 봉화대라고 기사가 떠들썩하게 난후 봉화대 밑 작은 전망대에
텐트가 쳐지고 발굴단원이 머물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분들은 자취가 없다.
전에 없던 쓰레기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깨끗하던곳이 발굴로 인해 파헤쳐져 있는데다, 누가 버렸는지 알수 없는 쓰레기는 찾는사람들에게 매우 불쾌감을 준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답답한 산행후 올려본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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