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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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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전에도 이길을 걸었었지요. 갓 결혼한 신혼부부로 이길을 걸을땐 추운계절이었습니다.

이가을 이렇게 곱고 예쁜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밑 구룡사 들어가는길, 금강소나무길이지요.

 가을이 깊어가는 모습이 눈으로 확인되는곳, 물소리 바람소리와 동무하며 걷는 가을여행길,

아름다운 곳입니다.

곁에 좋은 사람 함께 걷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감을 주는길, 바로 원주 치악산 금강소나무길입니다.

고즈넉한 산사를 찾는, 숲길. 경사가 급하지 않아서 남녀노소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길이라 더 접근하기 좋습니다.

이가을 여행지로 강원도 원주, 이곳은 가볍게 들러 볼 수 있는 여행지니까 빼놓지 말고 들러 보시길 바래요.

치악산 주차장에서 걸어서 왕복 1시간 30분이면 충분한 곳이니까, 넉넉하게 가을을 느껴 보아요~

 

칙악산 오토캠핑장이 너무 이쁘더라구요~캐러번도 많고, 숲과 계곡과 어울리는곳,

 

 

금강소나무길 들어가는 초입에 서있는 표지석

황장금표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벌채를 금지하는 표시로 설치된 것이다. 강원도 기념물 제30호

 

황장금표는 옛날에 궁궐을 짓을때 사용하던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허가없이 벌목하는 것을 금지한 표시이며, 치악산국립공원에는 2개의 황장금표가 있습니다.

구룡사들어가는 다리에 설치된 용머리~~~~

 

구룡사 일주문

 

구룡사 부도탑

 

구룡사의 은행나무, 노오란 빛이 곱다.

 

화석은행나무, 가을이 되면 잎이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는 1억5천만년전 공룡이 살던 시대부터 있었던 나무이기 때문에 화석나무라고 합니다.

 

 

 

구룡사 사천왕문

 

구룡사 보광루

구룡사는 치악산 능선 밑의 급경사지에 동향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중기 이후 산지에 건립된 사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룡사의 출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아래부분의 트여 있는 가운데 칸을 통로로 삼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누하진입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경사진 지형에 조성된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보광루는 구룡사의 가람배치에서 불이문의 성격을 가진 건물로 공간의 위계를 구분함과 동시에 누각아래를 통한 진입으로 전이공간역할을 한다.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집으로 호처마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이 있는 튼실한 원형기둥을 세워 아래층을 구성하고 있다. 출입통로로 사용되는 가운데 1칸을 제외한 나머지 여칸은 판벽으로 막아 창고 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창고 안쪽으로도 기둥을 세워 놓았으며, 각 칸마다 두 줄씩 가로.세로로 보를 놓았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공간을 향해 벽체가 없이 개방시켰으나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처리하였고, 정면의 각 칸 사이에는 2짝 판문을 달았다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하고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고, 이익공형식으로 연꽃과 연꽃 봉우리를 장식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봉황머리를 장식하였다. 누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이다.....보광루 안내판에서

보광루 아래를 통과해서 대웅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구룡사 대웅전

 

 

 

 

 

 

 

 

 

 

 

은행나무 수령200년, 소재지 소초면 학곡리 1018

나무둘레 350cm,  지정번호 강원-원주-38

 

 

가을 단풍이 예쁜 금강 소나무길, 구룡사로 들어가는 예쁜길이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대 서사시 토지를 집념을 가지고 집필하던 박경리.25년의 길고긴 여정이었습니다.

1969년 6월부터 1994년8월15일 탈고로 5부가 완성되기까지의 여정.

동학혁명부터 해방후 근대사까지 아우르는 장대한 드라마를 펼쳤던 토지.

통영사람이면서, 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살다가 원주에서 집필을하고

그 배경은 하동, 악양, 용정,다시 통영에 잠들기까지 박경리 대작가의 여정은 길고도 험했습니다.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46년 김행도씨와 결혼을 해서 그해 딸 김영주씨를 낳고 1948년 아들 김 철수씨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나 남편 김행도씨가 1950년 사상관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셨고 6.25중에 남편과 사별하게 됩니다.

또 1956년 아들 김 철수씨를 잃게 됩니다. 얼마나 모진 풍파를 이겨 내셨는지, 박경리 선생의 작품은 그야말로 위대한 유산입니다.

김동리 선생에 의해" 계산" 초회추천.

1956년 현대문학 8월후에 "흑흑백백"이 재 추천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당시에는 작가가 되려면 기성작가의 두번의 추천이 있거나 공모전의 당선이 되어야 했습니다.

"표류도,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 토지,파시등 많은 작품들에서 독특한 필력을 나타내었습니다.

 

1980년 원주 단구동에 정착 할때까지 박경리 작가는 후배 양성에 힘쓰고 그들을 돕기 위해 애쓰셨지요.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큰 획을 그으신 박경리 선생은 원주에서 살다 통영에 묻히셨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남기신 토지는 최씨 집안의 몰락과 재건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헤치고 해방을 맞는 우리나라 근대사를 통틀어 아우르는 뜻이 있기도 합니다.

큰 작가, 큰별은 졌지만, 선생의 깊고 높게 완성하신 작품, 토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은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용두레벌, 그리고 토지의 4부 ,5부를 집필하셨던 단구동 옛집까지

박경리 선생의 체취를 그대로 느껴보고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토지 마지막 원고와 만년필

 

단구동 옛집 배치도

 

posted by 산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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