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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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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봄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는듯 합니다.

매화소식이 반가운 요즘이다보니, 문득 문득 어디 나들이 갈까 하는 설레는 마음이 듭니다.

이번엔 청도와 대구방향으로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답사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곳 청도 읍성과 석빙고를 가보게 되었습니다.

청도 읍성은 고려시대 때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서 쌓았던 것을 조선 선조 23년(1590년)청도 군수 이은휘가 착공,

2년만인 선조 25년에 완공했다고 하네요.

 석빙고는 조선 숙종39년(1713년)축조되었으며 축조연대가 가장 오래된 석빙고랍니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답사팀에서 나눠준 자료를 참고로 돌아 봅니다.

석빙고는 1963년1월21일 보물 제3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빙실의 크기는 길이 14.75m, 넓이 5m ,홍예높이 4.4m 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요.

아, 옛날 냉장고 석빙고를 이렇게 마주합니다.

겨울철 강물이 얼면, 얼음을 깨서 저장했겠지요. 무더운 여름날 얼음 한조각이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함을 느꼈겠지만, 일반 서민은 꿈도 못꿀 얼음이었겠네요.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얼음, 그때는 보물다루듯 했을것 같아요.

2012년도에 영화배우 차태현이 출연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얼음을 네모나게 잘라서 새끼줄로 엮어 옮기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청도여행, 하면 떠오르는곳, 청도 와인터널도 있지만 우선 이곳 석빙고와 청도 읍성, 그리고 청도향교까지 둘러보신 다음

와인 터널로 가시면 되겠네요. ^^

그럼 오늘도 즐겁고 편안한 여행하세요.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고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 읍성 봉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하였다.

 

 

청도 읍성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청도 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곳 선정비군의 비석들은 읍성 외곽 서상리, 동천리, 남성현 등 주요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이 있던 주벼 도로가 확장되면서 발견된 비석들을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 2008년 청도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시대는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3기로 모두 30기이다.

 

 

청도읍성에서 가까운곳에 청도 향교가 있어요. 이쪽으로 걸어가면 7~8분정도 소요

답사 팀들이 석빙고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아치형으로 돌을 두르고 그위에 상판돌을 놓은다음, 그위에 흙을 덮어 석빙고의 온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석빙고 내부가 보인다. 약간 기울어 물이 빠져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위험하다고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치형으로

 

 

 

 

 

 

 

posted by 산위의 풍경
2015. 9. 18. 16:19 영화in screen

 영화 사도는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의 영화입니다.

개봉전부터 관심이 뜨겁던 영화 '사도'

송강호와 유아인의 케미는 어떨까 무척 궁금 했습니다.

그리고 유아인과 송강호의 사극연기는 어떨까도 기대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김해숙, 문근영, 전혜진등 연기파 배우들도 대거 등장하는 영화 '사도'

우리가 잘 아는 역사,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항상 의문이 드는 내용이지요.

영조는 나이 40 이 넘어서 얻은 아들, 선을 어여삐 여겼고, 조선왕조중 누구보다 빠르게 세자에 책봉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은 자라면서 점점 영조의 뜻에 어긋낫고 영조는 양위한다는 명목으로 세자를 괴롭혔습니다.

양위라는 것은 왕권을 세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이지만, 본심을 그렇지 않았으므로 대신들의 충성심과 세자의 효심을 떠보는 수단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곤룡포를 벗고 석고대죄, 머리를 땅에 지찢는 세자는 여러차례 밤을 세우며 양위한다는 영조의 어명을 거두는데 노력 해야만 했습니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고 이복 형인 경종의 요절로, 그리고 노론의 당파를 등에 업고 왕좌에 올랐습니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로 중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통성이 약했어요.

영조가 40넘어 얻은 아들 세자도 결국은 정통성이 없습니다.

중전이 낳지 않았고 경빈 이씨가 낳았으며 중전의 양자로 키워졌으니까요.

세자가 혜경궁 홍씨와 혼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이 훗날 정조임금입니다.

당시 중전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자빈이 낳았으니 정통성은 있었겠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왕권을 유지했던 임금, 영조 그는 82세까지 52년간 왕위를 유지했다고 전해지니까 엄청 나지요?

자기 자식을 어떻게 뒤주에 가두고 죽일 수 있었을까요?

영화 대사처럼 정말 권력은 부자사이에도 나눌 수 없어서 였을까요?

아님 정말로 사도세자의 정신세계가 이상하여 두고 볼 수 없었을까요?

죄를 물어 죽이면 역모죄인이 되고 그럼 세손도 위험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스스로 죽게 뒤주에 가둬 죽은후 뒤주를 열고 아들의 얼굴을 매만지던 영화속 영조의 눈물.

괜스레 저도 눈물이 나더군요.

정치적이던 가정사이던 어쨌든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아비의 심경은 아무리 강직하고 변덕심한 영조라 하더라도

가슴을 저미는 슬픔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죽은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죄를 없애 주어 세손의 안녕을 지켜주려 했던 마음이 보이는것 같거든요.

사도... 죽음을 슬프게 생각한다?

아무튼 영화 '사도'를 보면서 조선왕조중 가장 잔인하고 가슴아픈 역사의 한장면, 비극이 아닐까 합니다.

영조의 송강호, 사도세자의 유아인 대단한 배우들의 모습  이번주말에 확인해 보세요.

 

 

posted by 산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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