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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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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기념관

이용시간 9:00~18:00(입장은 17: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어른 개인 2000원, 단체 (20명이상 ) 1000원

청소년 개인 1000원, 단체 500원

어린이 500원, 단체 300원

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다산 기념관은 다산 정약용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생활과 유배생활, 해배 이후의 저술활동등 다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산 기념관에 안내장에 쓰여진대로 다산 정약용의 약력을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산(茶山)정약용

1762(영조38)~1836(헌종 2)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때 전자문을 배우고 10세때 자작 시집을 낼 만큼 총명하였다.

1777년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따.

1783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정조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된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정조의 총애 아래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배다리, 수원화성 거중기 설계 등 기술관료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목긴관의 의무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정조 사후 천주고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된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켜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이루게 된다.

해배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자신의 저작을 총정리한 여유당집을 완성하고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자택인 여유당 뒷산에 묻혔다. 1910년 문도 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와서 다산초당에 머물며 집필에 집중했던 만큼 많은 업적의 서적과, 편지, 하피첩, 화성을 지을때 사용되던 거중기와 화성의궤등 정약용 관련 자료를 만나 볼 수 있는곳이 다산 기념관입니다.

정조를 만나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터 이지만

그것은 또다른 약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조와 대립을 이루던 정순왕후 바로 영조의 계비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을겁니다.

정조가 승하한후 11세의 어린나이의 왕위에 오른 순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며 어린왕 순조는 아무 힘이 없었나봅니다.

정조의 업적이 거의 지워지다시피 하면서 정약용의 집안도 이 세월의 풍파에 휩쓸리게 되면서

유배의 길로 접어 듭니다.

그냥 좌절하고 주저 앉았다면 우리는 지금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나 흠흠신서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질고 백성을 사랑했던 개혁의 왕 정조를 만나서

실학을 꿈꾸고 실천하던 선비 정약용의 나래를 펼치는 세상이었을것 같습니다.

10년 계획의 화성을 2년 8개월만에 완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과학적 설계와 실용학으로 실천했기 때문일것 같습니다.

화성행궁으로 행차시에 배를 연결해 만들었떤 배다리 아시죠?

어마어마한 왕가의 행렬을 백성들은 굉장히 우러러 보았을것 같습니다.

정조대왕은 화성으로 옮기어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양위를 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정조 대왕이 조금더 생존했었더라면 세상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요,

아무튼 정약용의 꿈과 이상이 담긴 서적으로 우리곁에 남겨져 있습니다.

다산 기념관, 강진 여행에 천천히 둘러 보시길 바래요.

 

 

 

 

posted by 산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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