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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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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수리시설이라고 한다면 제일먼저 떠오르는곳은 벽골제일 것입니다. 벽골제는 백제시대 330년경에 축조된것으로 알려지고

워낙에 큰 저수지다 보니까 호남, 호서라는 특이하게 지역 명칭이 생겨날 정도로 거대한 저수지입니다.

우리나라 저수지의 시조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요.

오늘 가본곳이 저수지라서 이렇게 장황하게 벽골제이야기를 시작 했네요.

크기야 벽골제만큼은 아니지만 세월만큼은 견줄만한 청제못.

벽골제보다200년정도 뒤에 만들어진것 같습니다.

이곳은 경북 영천에 있는 못입니다.

신라시대 법흥왕때 만들어진 수리시설이라고 하니 정말 오래된 수리시설입니다.

옛날 농경사회에는 벼농사가 굉장히 중요한 통치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석기 시대부터 농사를 시작하여 벼농사를 짓게 되고 그 수확물의 양에 따라 지배구도가 달라졌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농사가 근본이 되는 시대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사회구조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농사가 가장 기본이 되는 생활이었으므로 농사는 국가의 중요한 재무구조가 되었겠지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수리시설 청제못은 지금도 영천  청제못 주변의 중요한 용수원이라고 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수리 시설이 면면히 이어져 오며 그 쓰임새가 아직까지 유효하다니 신기합니다.

그 터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용되어 오고 있는것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보물 517호 청제비가 있는곳, 청제못이 있는 영천에서 전해 드렸습니다

영천 청제비

보물 517호.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 7-1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있는 양면비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cm폭94cm 두께 16cm이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면에는 병진년 법흥왕 23년 536년의 간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 14년 원성왕 14년, 798년 절대 연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하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 시설과 관련이 있는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에 숙종 14년 1688년에 세워진 청제중립지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 4년 1653년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이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 사람이 다시 세웠다. 는 내용을 적고 있따.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 삼신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제비 안내문에서.... 

 

 

 

 

 

 

 

 

 

영천 청제( 경상북도 기념물 제 152호)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437-1외 필

 이 저수지는 보물 제 517호 영천 청제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 법흥왕 23년 이전에는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종 지지류, 청제문부 등의 자료를 통해 수차레의 수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이쓰며, 신라 시대에 축조된 수리시설 중 현존하는 최고의 제언 중의 하나이다.

현재 재방 길이는 243.5m이며 높이는 12.5m로 흙으로 쌓은 저수지이다.

저수지 면적은 110,000이고 저수량은 약590,000ton이며 현재도 이 지역일대의 중요한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제 안내문에서.-

 

 

 

청제못에서 물 내려가는 곳은 바위를 깍아 물길을 낸듯 암반을 타고 물이 흐르고 있다.

 

 청제못 물 내려가는곳. 암반 사이로 물길이 있다.

 

 

 

 흙둑을 쌓아 만든 청제못 둑방

 영천 청제비 (보물 제 517호-1969.11.21지정)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 7-1

 

 

 

 

posted by 산위의 풍경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있는 오리장림.

지금은 도로개발등으로 숲이 이분되어져서 안타깝다.

몇백년 지난 상수리나무, 버들나무들은 소남등 10여종의 나무들이 있다.

더위를 잊게 할 만큼 숲의 기운과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곳.

이제 가을에 접어 들면서 단풍드는 모습도 보고 싶다.

숲을 걷다보니 연세든 할머니가 도토리를 줍고 계셨다.

내일 또 오시면 주워 가시라고 눈에 띄는 도토리를 주워 데크위에 올려두었다.

지나가다가 울창한 나무숲에 압도되어 멈췄더니 천연 기념물 제 404호 오리장림이었다.

거닐다 보면 그네도 매어져 있는데, 실제로 그네를 뛰어 볼 수도 있다.

예전엔 너무 높이 올라가면 무서워서 멈췄는데...

또다른 재미다.

생각지도 않았던 체험, 이런게 여행의 묘미다.

숲에서 한참을 머물다  또 숲을 가르듯 도로를 타고 달리는 자동차, 거기에 자전거로 달려가시는 어르신도

오리장림과 더불어 풍경이 된다.

잠깐의 휴식도 좋았던 자천리 오리장림 자천숲이었다.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지천리 1421-1

천연 기념물 제 404호

이 숲은 옛부터 오리장림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자천숲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리장림이란 말은 화북면 자천리 일대 좌우 5리 에 걸쳐 울창한 수을 이루고 있따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숲이 형성된 약 400여년 전부터 이 곳 주민들은 마을 안녕을 기원하면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봄에 잎이 무성하면 그 해에는 풍년이 온다고 믿고 있따. 이 숲에는 10여종이 넘는 나무들이 수목박물관을 연상시키듯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여름에는 자천마을 앞을 흐르는 고현천과 함께 오리장림의 그늘이 시원함을 빚어낸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우리가 여행정보를 얻는 경로는 다양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지, 그지역 기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던지

이도저도 아니면 홍보용 책자등을 볼 수 있겠다.

특히 관광지역 안내는 각 지역 기관에서 제작한 홍보물을 손쉽게 구해서

참고 하기 마련이다.

이번에 영천시에 들렀을때는 그 안내서에 있는 두곳을 가봤는데, 들어 갈 수  없었다.

개인의 공간이라서 들어 가 볼 수없다면 관광 안내서에 차라리 기재를 하지 말던지,

아니면 정당한 요금을 지불 하고서라도 그곳에 도착한 관광객이 허탕치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문이 잠겨 있어서 마을분들께 여쭤보려고

경로당이랑 다 돌아 다녀도 마을에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대략 난감, 그냥 후퇴 하려고 하는데, 우편물 배달하시는 아주머니가 빈집에서 나온다.

"여기좀 촬영하러 왔는데, 사진 찍어도 되나요?" 했더니

"저도 여기 사람이 아니예요. 찍으면 어떨까요? 찍으세요."

한다.

매산고택에 들어갔을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구례의 운조루다.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시기적으로 동시대의 건축물이라 그런가 싶기도 한데, 이곳엔 연못이 없는게 운조루와는 조금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짝 대문을 밀고 들어가 안 마당에서 찍고는 다시 나와서 문을 걸어두고 왔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구경도 못했다.

아름다운 고택이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어서 건강하게 지켜지고 있는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산수정은 이 고택을 짓기 시작한 매산이 말년에 건너편 산밑에 지으셨다는데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

전혀 쓰고 있지 않은지, 건물에 생기가 없다.

예쁜 정자가 이렇게 버려지듯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아쉽다.

 다음번엔 안채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며 매산고택 소개를 마친다.

 옛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더욱 푸근한 매산고택

 입구에서부터 점점 높아지는 위풍당당한 고택이다.

 

 매산고택은....

이 건물은 조선 영조3년(1725년) 문과급제 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형조참의에 이른 매산 정중기 선생이 짓기 시작하여 그이 둘째 아들인 일찬이 완성한 살림집이다.  본래는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아랫사랑, 고방.방앗간채,측간채, 사당, 별묘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사당, 측간채만 남아 았다.

숭수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보현산을 정맥으로 한 기룡산 주령이 매화 나무 가지처럼 뻗어 내린 매화꽃수렝 해당하고, 안산은 매화꽃술을 향하여 날아드는 나비의 모습이라고 한다.

건물 구조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인 ㅁ자형이며, 경사진 산기슭에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3단 높이의 지층을 이루고, 뒤로 갈수록 높아져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안채는 두리기둥을 쓰고, 초익공의 공포를 짜는 등의 장식을 하여 고급스러운 멋을 부린 것과 사랑채 전면에 난간을 둘러 수평성을 느끼게 하였다.

이 집의 서남쪽 바위벽에 있는 산수정은 매산이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전면 3칸 맞배집으로 가운데는 마루, 양쪽이 온돌방인데 자연석 바위를 주춧도로 하여 기둥 높이가 각각 다르고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담길이 멋스럽다.

 구례 운조루에서 본것처럼 비슷한 형태가 있다.

 

 

 산수정의 독특한 문고리

 산수정은 뒤로 들어갈 수 있나보다.

앞에는 아무곳에도 계다이 없다.

 

 매산고택의 문고리, 여느집 대문고리와 사뭇 다르다.

 

 안채에는 대문에 자물쇠가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인이 계셨으면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보고 싶어서 경로당이랑 사람을 찾아 헤맸는데,  마을에서 사람이 안보였다.(추석을 앞두고 있어서 벌초에 농사일이 바쁜철이기도 하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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