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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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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맛집인 한주옥

이곳은 여행 동호인 카페인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서 연꽃여행을 가면서 들르게 된 곳이예요.

궁남지와 부여 박물관을 들른후 찾아간 한주옥.

착한가게 마크가 붙어 있네요.

이곳에 가장 유명한 메뉴가 간장게장이었는데 게가 비싸고 품귀현상이 일어날때

대하장을 만들었대요.

대하장도 도톰한 새우가 꼬들꼬들 씹히는게 맛있었어요.

머리, 몸통, 꼬리 먹기 좋도록 잘 손질되어 나왔어요.

광어회와 광어 생선탕이 메뉴에 나왔는데, 굉장히 맛있었어요.

여행중, 이렇게 맛있는 먹거리는 여행지의 기억을

더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주는것 같아요.

한주옥, 다음 군산여행 가도 이곳에 가볼만 할 것 같아요.

더운 여름, 잘 챙겨먹고 기운내야겠죠? 지치지 않는 여름 보내시길 바랄게요~

대하장 백반을 먹어서 광어회와 대하장과 생선탕이 나왔어요.

 

꽃새우장

 

광어 매운탕

맑은 국물이 시원했어요.

두툼한 광어도 먹을게 많구요~~

 

박해일, 정진영씨가 다녀갔네요.

 

착한가게

 

 

posted by 산위의 풍경

전등사, 이주일 연속 가게 되었네요.

처음 전등사에 갔을때는 성돌이를 할 수 있다는것을 모르고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갔는데, 그래도 부득불 오르고 싶어 서문에서 북문을 돌아 내려 왔었지요.

부처님 오신날 전이라 대웅전 앞에 한창 등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뭔가 찜찜한 겁니다.

아, 전등사가면 양헌수 승전비를 꼭 보고 오려 했는데 그곳을 놓치고 못보고 온 것이지요.

다음주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란 여행 카페에서 전등사를 간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신청을 해서 전등사를 다시 갔지요.

다른곳보다, 삼랑성 성돌이를 하고 꼭 양헌수 승전비를 보고 오리라.

삼랑성문인 종해루 (남문)을 지나 바로 왼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난번에 왔을땐 서문에서 북문으로 올랐는데, 성이 허술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었어요. 잡석으로 만든 성이 위태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지요.

이번에 오른 남문에서 서문가는길은 아름답게 잘 남아 있는 성의 모습입니다.

아 이곳은 산성답네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면서 노을이 참 아름답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쁜 걸음을 옮겨 봅니다.

서문에서 내려와 정족산 사고옆을 지나 내려오면 약사전과 대웅전앞에 등이 한가득 달려있지요.

이곳을 지나 동문쪽으로 바로 향해 봅니다.

바로 양헌수 승전비가 있는곳이예요. 지난번에 왔을때 못들러봐서 내내 아쉬웠던, 그래서 다시 전등사를 찾게된 그 목적지 말입니다.

승전비는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선진대국이던 프랑스를 맞아서 물리쳤다는 양헌수 승전비, 그의 기개, 이곳을 호령했을 그 때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성을 지킬 당시의 360여명의 기록이 탑뒤에 새겨져 있다고 해요.

자, 이제 만족합니다. 승전비를 보고나서 바로 아에 있는 동문, 동문으로 내려가다 보니,,,,아차차~~ 나 남문쪽에서 들어왔지!

그쪽에 차량이 있으니 그리 내려가야 하는데, 다시 동문으로 들어가서 남문쪽으로 내려옵니다. 남문과 동문은 아주 가까운 지근거리 입니다.

이제 전등사 여행을 마무리 하는듯한 깔끔한 마음이 드네요. 일주일 내내 찜찜 했거든요.

전등사 가면 양헌수 승전비를 꼭 보고 오는게 예ㅡ의.

그것이 이나라를 위해 싸웠던 조상님들을 기리는 마음 아닐까요? 좋은 여행 마무리 해서 기뻤습니다.

 

 

문화재 구역 전등사 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초등학생 1000원

노인(경로) 65세이상 신분증 제시 면제

 

삼랑성

 사적 제 130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선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1976년 복원된 종해루

남문

 

앞주에 갔을땐 아직 연한 연두빛이 많이 돌던 숲, 싱그럽다.

 

부처님 탄신일 전에 갔을때 아직 등을 달고 있어서 사다리도 보이고 그랬다.

 

 

정족산 삼랑산성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인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 사고로 옮겼다. 다시 마니산 사고를 거쳐 현종 1년(1660)이곳으로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이 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 후 옛 현판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다시 달았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67호

 

조선의 4대 사고

정족산 사고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적상산 사고

 

기록의 나라 조선

 

삼랑산성 서문

복원된 곳이다.

 

서문에서 올라서면 이렇게 숨은 문있는곳이 있다.

뒤로 보이는 강화도 정리된 논밭,(옛날엔 저곳은 모두 바다였다)

 

일주일새 녹음이 많이 짙어졌다.

 

 

이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문으로 가는데, 정족산성중 가장 성다운 자태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성벽길을 따라 걷는 맛이 가장좋지만 또 가장 오르막길이기도 하다.

 

남문에서 올라오면 서문으로 가는 길, 성벽길이 아름답다.

 

 

서문, 박찾사 카페의 일행분이 서문을 촬영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날 지나서 가니 이제 사다리도 다 치워져 정리된 등, 대웅전앞에 한가득 등이 달렸다.

 

 

한창 불경을 외시는 스님을 바라보았다.

 

 

양헌수 승전비

 

 

1866년 병인 양요때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년)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활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높이가 181cm, 비신의 높이가 163cm, 두께가 27cm이다.

 

동문

 

동문밖의 모습

 

posted by 산위의 풍경

 피안도,  피안사로 불렸다는 간월암.

고려말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서 간월암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늘 사진으로만 보던 간월암을 드디어 직접 가보게 되었습니다.

15년만의 한파가 몰려온 겨울날, 눈꽃 가득한 겨울여행으로 서산으로 떠났는데요, 다행히

물때도 딱 맞아서 간월암을 갈 수 있어서 행복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새벽 6시 45분 집합,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카페 동호인들과 떠난 겨울여행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왔다고 해서 큰 걱정이었는데, 무사하게 잘 다녀올 수 있어서 신년 운수대통한것 같습니다.

아는사람 하나도 없는 여행,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할까.

오히려 이런 여행이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내가 가고싶은곳을 내맘대로 찾아 갈 수 있는 여행, 카페 동호인들이지만 아는사람이 없다는 특이점.

이렇게도 여행을 갈 수 있네요.

역시 겨울엔 눈이 함께 해야 더욱 겨울다운 풍경이 펼쳐 지는것 같아요.

사진 하시는분들은 한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촬영을 하시네요.

많이 추울것 같았는데, 왠일인지 부산보다 덜 춥게 느껴지네요. 아마도 차가운 바람이 덜해서 그런것 같아요.

 

 눈속의 간월암

 

 

 

 

 

 

 

 

 

 

 

 간월암의 유래

간월암은 과거 피안도 피안사라고 불리기며 밀물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또는 배와비슷하다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말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던  중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이라 하고, 이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바로 그 후에 광복을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 때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보기 드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의 섬들과 어우러진 낙조와 함께 바다위로 달이 떠올랐을 때의 경관이 빼어나다. 

 

 지붕위 곱게 내려앉은 눈

 

 간월암 전경

 

 

 

 

 

 

 

 

 

 

 

 

 

 

 

 

 

 

 

 

 

 

 

 

 

 

 

 

 

posted by 산위의 풍경

어느날, 지인께서 수원화성과 융릉 건릉으로 여행을 간다고 같이 가려나 물어 오셨습니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란 카페회원들이 함께 가는 답사라고 말이지요.

수원화성은 여러 차례 가본곳이지만, 또 가고 싶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왕들중 정치적인면에서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임금으로 세종과 정조를 가장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역대 가장 위대한 성군이 있다면 정조를 꼽고 싶을만큼 혁신적이고 백성을 사랑한 임금으로 효성이 깊은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업적중 가장 뛰어난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정조대왕이 사후에 머물게 된곳, 건릉입니다.

건릉은 왜 이곳에 자리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릉원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일텐데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영,정조 시대의 파란만장한 당쟁의 희생양,

비운의 동궁 사도세자. 조선 고종이 장조로 추존하였기 때문에 현재는 융릉이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당쟁으로 인해 아버지 영조에게 사사되는 비운의 동궁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지키려면 사사된 동궁 이선을 죄인신분으로 두면 안되기에 사도세자로 신분을 복원하여 묘를 썼지요.

정조를 영조의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훗날 있을지도 모를 정통성의 흔들림을 차단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왕위에 올라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며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지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며 현릉원에 모셨습니다.

그후 고종에 의해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이 되었던 것이죠.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를 합장한 왕릉이고

건릉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를 합장한 왕릉입니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숲길은 소나무 숲길로 걷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해설사님이 같이 가면서 해설을 자세히 해 주기 때문에 그 가슴아픈 효심 절절한 정조의

이야기가 가슴에 파고 듭니다.

묘에서 현릉원으로 융릉으로 죽어서도 신분의 변화를 겪게 된 사도세자.

화성여행, 융릉 건릉을 꼭 들러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다녀오게 되서 기쁩니다.

 

 

융릉, 건릉에 들어가기전 입구에 있는 향나무.......오랜세월을 몸으로 말하듯, 헐벗었지만, 근근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네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왕릉

융릉 건릉 관람안내, 월요일은 쉽니다.

융릉, 건릉은 사적 206호입니다.

 

고요한 숲길이 평온해 보여 참 좋았습니다.

융릉에 들어가는 다리,,,,,이것은 사후세계와 이승을 구별짓는 의미이기도 하답니다.

 

융릉이 보입니다. 소나무숲에 둘러쌓인 왕릉은 편안해 보입니다.

곤신지, 융릉 들어가는 왼쪽편에 여의주처럼 동그랗게 연못이 있습니다.

원형 연못 곤신지는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곳이기 때문에 판 연못입니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다리, 융능교

 건릉으로 들어가는길

 

 

 

 

 

 

 

건릉

건릉이 보입니다.

 

 

 

건릉의 묘비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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