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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의 풍경
산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블로그기자단 기장군홍보단 기장군민필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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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여행은 요즘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이다.

아들 덕분에 대구 영천 곳곳을 빠삭하게 알아갈 지경이다.

학교 행사때문에 옥천에 다녀오면서 동대구에서 아들을 만났더니

밤중에 특별히 가 볼만한 곳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모처럼 엄마 아빠와 추억공감을 위한곳으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에 가보기로 했다.

전에 혼자 왔었는데, 은은하게 흐르던 김광석 노래 때문에 울컥 가슴이 울먹여졌던 곳,

그곳에 아들과 손잡고 걸어보고 싶었다.

남편은 뒤에서 따라오고 아들과 손잡고 걸었다.

장성한 아들의 손을 잡고 걷는 한장의 추억을 가슴에 새겼다.

거리는 조용했다.

방천시장의 밤거리는 족발집들이 즐비하고 떠들석 했지만, 옆의 김광석 길은 한산한듯 보였다.

딱 한곳. 분비는 곳이 있다.

추억의 문방구.

어릴적 봤었던 군것질거리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것은 추억을 기다리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어릴때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자주 갔었다.

내가 어릴때 그토록 소망하던 군것질거리들의 추억 때문에.

오늘 또 그 추억과 마주했다.

추억은 오래 될수록 더욱 선명하고 그리워진다.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에 새로운 명소가 탄생한것 같다.

이길은 어차피 추억의 길이다.

김광석을 그리며 또 어릴때의 추억도 마주하게 되는곳.

아들과 걸어서 더욱 행복한 길이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서른즈음에,

posted by 산위의 풍경

우리가 여행정보를 얻는 경로는 다양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지, 그지역 기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던지

이도저도 아니면 홍보용 책자등을 볼 수 있겠다.

특히 관광지역 안내는 각 지역 기관에서 제작한 홍보물을 손쉽게 구해서

참고 하기 마련이다.

이번에 영천시에 들렀을때는 그 안내서에 있는 두곳을 가봤는데, 들어 갈 수  없었다.

개인의 공간이라서 들어 가 볼 수없다면 관광 안내서에 차라리 기재를 하지 말던지,

아니면 정당한 요금을 지불 하고서라도 그곳에 도착한 관광객이 허탕치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문이 잠겨 있어서 마을분들께 여쭤보려고

경로당이랑 다 돌아 다녀도 마을에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대략 난감, 그냥 후퇴 하려고 하는데, 우편물 배달하시는 아주머니가 빈집에서 나온다.

"여기좀 촬영하러 왔는데, 사진 찍어도 되나요?" 했더니

"저도 여기 사람이 아니예요. 찍으면 어떨까요? 찍으세요."

한다.

매산고택에 들어갔을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구례의 운조루다.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시기적으로 동시대의 건축물이라 그런가 싶기도 한데, 이곳엔 연못이 없는게 운조루와는 조금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짝 대문을 밀고 들어가 안 마당에서 찍고는 다시 나와서 문을 걸어두고 왔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구경도 못했다.

아름다운 고택이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어서 건강하게 지켜지고 있는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산수정은 이 고택을 짓기 시작한 매산이 말년에 건너편 산밑에 지으셨다는데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

전혀 쓰고 있지 않은지, 건물에 생기가 없다.

예쁜 정자가 이렇게 버려지듯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아쉽다.

 다음번엔 안채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며 매산고택 소개를 마친다.

 옛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더욱 푸근한 매산고택

 입구에서부터 점점 높아지는 위풍당당한 고택이다.

 

 매산고택은....

이 건물은 조선 영조3년(1725년) 문과급제 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형조참의에 이른 매산 정중기 선생이 짓기 시작하여 그이 둘째 아들인 일찬이 완성한 살림집이다.  본래는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아랫사랑, 고방.방앗간채,측간채, 사당, 별묘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사당, 측간채만 남아 았다.

숭수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보현산을 정맥으로 한 기룡산 주령이 매화 나무 가지처럼 뻗어 내린 매화꽃수렝 해당하고, 안산은 매화꽃술을 향하여 날아드는 나비의 모습이라고 한다.

건물 구조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인 ㅁ자형이며, 경사진 산기슭에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3단 높이의 지층을 이루고, 뒤로 갈수록 높아져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안채는 두리기둥을 쓰고, 초익공의 공포를 짜는 등의 장식을 하여 고급스러운 멋을 부린 것과 사랑채 전면에 난간을 둘러 수평성을 느끼게 하였다.

이 집의 서남쪽 바위벽에 있는 산수정은 매산이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전면 3칸 맞배집으로 가운데는 마루, 양쪽이 온돌방인데 자연석 바위를 주춧도로 하여 기둥 높이가 각각 다르고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담길이 멋스럽다.

 구례 운조루에서 본것처럼 비슷한 형태가 있다.

 

 

 산수정의 독특한 문고리

 산수정은 뒤로 들어갈 수 있나보다.

앞에는 아무곳에도 계다이 없다.

 

 매산고택의 문고리, 여느집 대문고리와 사뭇 다르다.

 

 안채에는 대문에 자물쇠가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인이 계셨으면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보고 싶어서 경로당이랑 사람을 찾아 헤맸는데,  마을에서 사람이 안보였다.(추석을 앞두고 있어서 벌초에 농사일이 바쁜철이기도 하다.)

 

 

 

 

 

 

 

 

 

 

posted by 산위의 풍경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를 모시는 서원으로

영천시 임고에 있다.

예전 서원은 규모가 작았으나 지금은 대대적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의 병문안을 다녀오던중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는 포은 정몽주 유물관도 함께 있다.

임고서원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필자이다.

임고서원을 보러 들어가는데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들이 나오시길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여쭸더니 흔쾌히 찍으라고 하셨다.

사진을 찍고나니

모델비는 얼마나 줄거냐고 웃으셨다.

요즘, 사진 찍자고는 많이들 하면서 사진을 안주더라며

사진을 줄 수 있겠냐고 하셨다.

휴대전화로 저장해서 보내 드리면 되는 줄 알고 그러마고 전화 번호를 받아서 저장했다.

그런데,,,갑자기 주소를 부르신다.

경북 의령군.....

경북  영천시....

순간 당황했지만, 꼼꼼히 주소를 적었고, 확인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것저것 바쁜일을 처리하고 나니 문득 그 전화번호 메모건이 생각났다.

부랴 부랴 사진관으로 사진 파일을 보내서 출력을 부탁했다.

사무실 점심시간 1시간안에 사진 보내는 일을 마무리 해야 했다.

 부리나케 뛰어나가

사진을 찾아서 주소적은 분들에게 등기로 보냈다.

문자로 사진을 보냈다고 말씀드렸는데, 잘 받으셨는지는 모르겠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요즘 사진을 찍어도 인화를 하지 않는다.

거의 컴퓨터에 저장을 해 놓기 때문에 그때 그때 찾아서 보고 하니까.

그러나 어르신들 때문에 사진을 인화를 해서 보내 드렸다.

임고서원, 이런 특별한 에피소드 때문에라도 오래 기억에 남겠다.

 

 

 

 

 

 

 

 

 

 

 

 

 

 

 

 

 

단심가

    포은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되어

넑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백로가

     포은선생 자당 지음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임고서원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년)부래산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임ㅈㄴ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년) 현 ㅟ치에 중건, 재사액 되었다.

인조 21년(1643년) 여헌 장현광 선생을 배향하고 정조 11냔(1787년)지봉 황보인 선생을 추향하였고, 고종8년(1871년)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5년 복원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6년(1337년)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년)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여고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외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지조로 추앙되었고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의 한사람은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 하였으나 공양왕4년(1392년)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조선태종 원년(1401년)영의정에 주증되었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문층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고서원 500년된 노거수

은행나무

높이 약 20미터

 

단심로라 하여 임고서원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이다.

 

 

포은 유물관 운영안내

매주 화요일~일요일(공휴일 퐇ㅁ)

개관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은 다음날)

위치

경북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 447(양항리 501)

문의 054-334-8982

 

포은선생 일대기 애니메이션 상영

10시,11시,13시,14시,15시,16시

 

 

 

posted by 산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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